특별육아휴직

서울을 벗어난 뒤로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 날씨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십 년 전 자취짐을 꾸려 상경한 뒤로는 방에서 하늘 보기가 힘들었다. 짧게는 육 개월, 길게는 삼 년 간격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 때마다 엑소더스를 다짐했다. 마땅히 어디로 가야할지 목적지를 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각박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비루한 주거환경으로부터 속히 벗어나길 간절히 원했다. 볕이 잘드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은 비싸고 좁았다. 운동화를 신고 동네 근처 공원을 뛰러 나가야 비로소 오늘 날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밤새 공기 청정기를 돌린듯 보드라운 공기라면 맑음. 공기의 중의 습기가 모두 모공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라면 비. 서울을 벗어난 오늘 아침은 침대에 누워서도 무더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자고 있는 아이와 아내를 뒤로하고 침실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거실과 주방 창을 모두 열고 밤새 정체된 공기를 환기시킨다. 몸 안의 농도 짙은 공기가 바깥의 신선한 공기로 모두 교체될 때까지 심호흡을 했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단호박과 고구마 하나씩을 꺼내어 뜨거운 커피와 곁들여 조금씩 베어 먹었다. 식탁에 아이패드를 세워놓고 지난 밤 뉴스를 시청했다. 쟁반 위에 음식을 모두 먹어치울 때쯤 완전히 잠에서 깼다. 샤워를 하며 오늘은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줄기에 얼굴을 마사지하며 오늘 할 일에 하나씩 추가했다.

아이와 함께 밖에 나갔다. 목적지는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 지방으로 내려와 심사숙고해 선택한 어린이 집이다. 지역 정보도 없고 지인도 없어서 순전히 나와 아내의 정보력으로만 판단했어야 했다. 몇 가지 불안한 점 때문에 다른 어린이집도 알아 보았다. 하지만 다시 환경에 적응해야할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쉽게 움직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다는 곳에 고스란히 불만을 얘기하기도 조심스럽다. 말못하는 아이를 맞기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오늘 등원길에서는 아이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했다. 놀이터를 들르고 계단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조급하지 않다. 출근 시간이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가 늑장을 부리면 속이 탄다. 나도 모르게 짜증스런 목소리와 행동을 아이 앞에 내뱉어버린다. 하지만 오늘은 여유롭다. 휴직 첫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는 아버지에게도 육아휴직을 제공한다. 이 기간에도 정상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특별육아휴직.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이사 온 뒤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서울의 분주함을 벗어났지만 지방 소도시만의 여유로움을 누릴만한 기회가 아직 없었다. 장모님의 육아 도움도 없다. 어린이집은 아직 적응 기간이다. 좀 쉬고 싶다. 쉰다면 작년에 출시한 온라인 강의의 후속작을 만들고 싶다. 쉬고 싶음과 일하고 싶음 때문에, 두 욕구가 어울리지 않지만, 근무 기간 중 딱 한번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장학퀴즈에서 듣도보도 못한 어려운 퀴즈에 마딱뜨렸을때 단 한 번의 전화찬스를 쓰는 것 처럼.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곧장 출근 버튼을 누른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출근 버튼을 누르고 커피를 내려 업무를 위한 준비 의식을 치웠을 것이다. 오늘은 커피를 잔에 담아 이제 막 햇살이 들기 시작한 발코니로 향했다. 창 너머 보이는 놀이터는 아이들이 놀기엔 이른 시간이다. 밤새 자던 새 한마리가 둥지 밖으로 나와 우레탄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다. 저만치 떨어진 소방차전용구역에는 햇살에 고추를 말리려는 일 층 할머니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는 평소에 읽고 싶었던, 하지만 여유가 없어 미뤄두었던 소설책을 들고 타일 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오랜만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소설을 너무 빨리 읽어버리면 아쉽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자. 강의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년 봄에 출시한 리액트 후속편이다. 고급주제와 훅을 다룬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쏟아내고 예제 코드를 만든다. 대략적인 목차도 구상해 본다. 너무 자세한 부분은 빼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 목차의 균형을 맞춘다. 목차를 하나씩 잡아 본격적으로 내용을 작성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멈추고 그 부분을 공부한다. 블로그에 짧은 글로 발행한다. 다시 강의 제작으로 돌아온다. 막히면 다른 강사의 강의를 옅본다. 목차는 어떻게 구성했고 설명은 어디까지 하는지. 수강생은 몇 명이고 수강평은 어떤지? 과연 나는 강의 제작이라는 일련의 활동을 좋아하는걸까? 혼자서 일하는 것 보다는 직장에서 팀으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가? 혼란스럽다. 내 결정에 대한 의심이 든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놓고 눈을 감는다. 이럴 때는 뛰어야 해.

뛰는 것만이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준다. 심장 박동수를 높이는 운동이면 무엇이든 효과가 있다. 달리기, 헬스, 요가. 달리기 만큼 쉬운 것이 없다. 욕심 내지 않고 적당한 속도로 20분 이상 뛰면 된다. 이런 단순한 운동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 준다.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심플하게 정리하고 불필요한 생각을 떨쳐내 머리속 밀도를 낮춘다. 얼마 전에 발견한 산책길을 뛰자. 동목포역길. 여덟 살 조그마한 종이 기차표를 사서 펀치로 확인 받은 뒤 탓던 비둘기호 열차가 지나갔던 기차길이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기차길은 없어지고 단촐한 산책길이 놓였다. 오랜된 가로수와 모교 뒷길, 하늘하늘 비행하는 잠자리, 놀이터에 늘어진 노인과 총총걷는 아기들. 문득 내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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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특별육아휴직을 마쳤다. 가족여행 2번, 상경 2회, 발행한 블로그 글 5편, 강의 제작 진도율 15%. 나름의 성과를 얻고 내일 회사로 돌아간다.